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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연중 제20주일(2026년 8월 16일) - 김명철 요셉 신부님(광주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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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8.17 0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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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화답송에서 우리는 시편 67편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복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들은 야훼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내린 복이 이스라엘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복의 지평을 땅끝까지 넓힙니다. “세상 끝까지 모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그래서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복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한 민족에게서 모든 민족에게로 흘러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은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풍성한 수확과 푸른 목초지, 많은 가축과 풍성한 고기잡이처럼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복을 발견했습니다. 삶에 필요한 것을 얻을 때마다 단순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하나의 복은 정의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도 노래했습니다. “당신이 민족들을 올바로 심판하시고 세상의 겨레들을 이끄시니, 겨레들이 기뻐하고 환호하리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의는 이스라엘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축복이 전해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의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이었고, 더구나 당시 사회에서 쉽게 무시당할 수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참으로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안 그래도 딸의 고통으로 힘든데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을 찌르는 가시와 같았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강아지라고 합니까? 됐습니다!”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달랐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신을 찌르는 가시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 아픈 말씀 안에서 오히려 부스러기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큰 빵을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부스러기 하나라도 좋습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면 그 작은 부스러기 하나만으로도 제 딸을 살릴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녀는 부스러기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딸이 나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바오로 사도의 가시가 떠올랐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21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 가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육체적인 질병이었을 수도 있고, 끊임없는 박해, 사람들의 오해와 반대였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바오로에게 평생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 가시를 없애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시를 빼 주시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바오로가 원했던 것은 가시가 없는 삶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기도합니다. “주님, 이 고통만 없어지게 해 주십시오.”, “이 사람만 바뀌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문제를 없애 주시는 대신 그 문제를 견디어 낼 힘을 주십니다. 가시를 뽑아 주시는 대신 가시를 품고 살아갈 은총을 주십니다. 바오로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가시를 절망의 이유로 만들지 않고, 더 깊이 하느님을 찾는 기도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가시를 사랑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가 코린토 113장에서 사랑을 노래하면서 가장 먼저 꺼낸 말도 이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바오로는 사람들의 오해도 겪었고, 박해도 받았으며,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사랑했던 공동체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가시보다 더 큰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러한 사랑,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게 했던 삶은 바로 감사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합니다. 건강하면 감사하고, 일이 잘되면 감사하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바오로의 감사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8) ‘좋은 일에 감사하십시오가 아닙니다.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고통 자체가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시가 감사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시가 있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 이 고통마저도 언젠가 새로운 은총의 길로 바꾸어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감사믿음입니다. “주님, 지금은 아픕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오로의 감사였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함께했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강렬하게 만난 뒤 평생 그분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으며, 가시를 품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 바라보면 그의 삶 역시 끝도 시작도 보이지 않는 사랑의 미로와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오로에게 그 미로에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의 이름은 믿음이었고, 감사였으며, 사랑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아프게 하는 말씀에서 부스러기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몸에 박힌 가시를 감사와 사랑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받은 하느님의 사랑은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삶의 가시를 품고 살아갑니다. 빼 버리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고, 때로는 왜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시는지 묻고 싶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부스러기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고, 감사는 가시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나누기 시작할 때 그것은 축복이 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미소 하나, 누군가의 손을 한 번 잡아 주는 것, 힘든 사람을 위해 바치는 짧은 기도 하나. 이러한 모습이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처럼 작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갈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부스러기는 더 이상 부스러기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하느님의 축복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받은 축복이 한 사람에게서 또 한 사람에게로 흘러갈 때 오늘 화답송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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