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시대의 그리스도교 - 토마시 할리크(Tomáš Halík)

홈지기2020.06.09 15:19조회 수 5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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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세계는 병들었다. 이는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명의 상태도 그렇다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전 세계적인 유행과 이에 따른 여러 현상들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병든 세계, 이것이 바로 시대의 징표이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사순절을 이례적인 방식으로 시작하면서, 이 감염병이 사회의 통상적인 기능을 일시적으로 방해하겠지만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곧바로 이전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은 부질없다. 전 세계적으로 겪는 이번 사태의 체험에 따르면,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재난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생필품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씀도 여전히 중요하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우리 세계의 안전이 이처럼 뒤흔들리는 사태를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다. 외적으로 보면, 피할 수 없는 세계화의 과정은 그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된 세상이 폭넓게 남긴 상처들이 이제 드러난다.

 

교회 - 야전병원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교에, ‘세계무대의 첫째 주역(Global Player) 가운데 하나인 교회에, 신학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랐던 것처럼 야전병원이어야 한다. 야전병원의 은유를 통해 교황이 의도하는 바는 이렇다. 곧 교회는 안락하고 호화로운 고립속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교회는 자기 대표자들이 조금 전까지도 사람들에게 주었던 상처를, 아니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주었던 상처도 참회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은유를 더 생각해보다. 우리의 삶과 더 깊이 연결시켜 생각해보자.

교회가 야전병원이어야 한다면, 교회는 자기 역사의 처음부터 줄곧 그랬던 것처럼, 어쨌든 건전하고 사회적이고 헌신적인 봉사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훌륭한 병원처럼 다음의 세 가지 과제도 이행해야 한다.

- 진단(‘시대의 징표를 깨닫는 일)

- 예방(공포, 증오, 포퓰리즘, 전체주의 등과 같은 나쁜 바이러스가 널리 확산되는 사회에

대해 면역성을 길러주는 일)

- 회복(용서를 통하여 과거의 정신적 충격을 해소하는 일)

 

텅 빈 교회 - 표징이며 호소

지난해 부활절을 앞두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로 무너졌다. 올해의 사순시기에는 많은 대륙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마찬가지로 수많은 유다인과 이슬람교도도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나는 사제와 신학자로서 텅 비어 있고 닫혀 있는 교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여왔다. 나는 교회의 이런 모습을 하느님의 표징이며 호소로 생각한다.

우리 세상의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는 데에는 영적 식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식별을 위해서는 또한 격양된 감정과 선입견, 공포와 소원이 투사된 생각 등과 거리를 둔 관상이 요구된다. 재난의 순간에는 잠자고 있던 악한 영들이 깨어나 다양한 모습으로 집요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포심을 조장하고,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종교적인 타락을 꾀한다. 하느님에 관한 그들의 환상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무신론이 바라던 그대로다.

나는 재난의 시간에 우리 세계의 무대 뒤편에 마치 화가 난 감독처럼 앉아 있는 그런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하느님을 힘의 원천으로 받아들인다. 곧 이런 상황에서 헌신적이고 연대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종교적 이유없이도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는 분을 찾는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물음이 있다. 그것은 텅 비어 있고 닫혀 있는 현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망원경을 통해 가까운 미래를 바라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냐는 물음이다. 몇 년 후에 우리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런 모습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 이미 적지 않은 나라에서 성당과 수도원과 신학교가 계속 비어 폐쇄되었는데, 이는 우리에게 충분한 경고가 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우리는 이런 쇠퇴에 대한 책임을 그토록 오랫동안 외적 영향(‘세속주의의 쓰나미’)에만 계속 전가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동안 지속되었던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장()이 마지막에 이르렀고, 그러기에 이제 다음 장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가?

텅 비어 있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교회의 공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그리스도교의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을 경우 교회의 미래가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이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더욱더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 교회의 회개란 하나의 개선이 아니라, ‘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에서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향전환을 뜻한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성무 금지의 형벌을 지나치게 부과했고, 이에 많은 지역에서 교회 조직 전체의 이른바 총파업으로 말미암아 미사와 성사들이 거행되지 못했을 때, 신자들은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중시하는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평신도의 모임들과 신비주의가 크게 도약했다.

신비주의의 이런 비약은 종교개혁의 발생에 크게 기여했다.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칼뱅의 종교개혁 그리고 예수회와 스페인 신비주의와 결합된 가톨릭 종교개혁에도 기여했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도 관상의 재발견은 새로운 개혁 공의회로 가는 공동합의적인 길을 보완할 수 있다.

 

개혁의 호소

우리는 교우들과 함께 하는 미사와 각종 행사를 중단한 지금의 사태를 하나의 카이로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곧 일단 멈추고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우리가 개혁의 여정에서 어떻게 계속 전진해야 하는지를 깊이 숙고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곧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단순한 구조 개혁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라,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깊이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가 미사 중단 기간에 인터넷이나 방송으로 미사성제를 생중계하는 식으로 재빨리 인위적인 대체수단에 의지하는 것은 그리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가상(假想) 신심혹은 “TV미사나 인터넷 미사로 방향을 바꾸어 화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차라리 우리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 “내 이름으로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우리는 교회의 조직을 계속 움직이기 위해, 유럽에서의 사제 부족을 폴란드,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지역으로부터 대체부품을 수입하여 메꿀 수 있다고 실제로 생각했던가? 우리는 정말 아마존 시노드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동시에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활동 공간을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많은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사제 없이도 살아남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예외적인 상태는 교회의 새로운 형태를 위한 단지 하나의 힌트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이런 형태의 선례들은 많이 있었다. 교구와 본당 사목구와 사도직 활동단체 등의 우리 그리스도교의 단체들과 수도회 단체들은 유럽의 대학들이 설립되었던 이상(理想)에 다가서야 한다. 말하자면 교회는 학생과 선생이 서로 친교를 나누는 일, 그리고 자유로운 토론과 깊은 명상을 통해서 진리를 찾던 지혜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 영성과 대화가 가득한 그런 외딴섬에서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나올 수 있다.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되기 하루 전에 요한 묵시록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방향을 제시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문 앞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묵시 4,20)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안으로부터 문을 두드리시며 밖으로 나가길 원하십니다.” 실제로 교황은 이를 실천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나는 수년 동안 하느님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유명한 미친 사람’(진리를 말하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사람, 광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여왔다. 그 이야기는 미친 사람이 교회에 뛰어 들어가 신의 영원한 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부른 다음, “교회들이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이런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항의하는 말로 끝난다. 나는 교회의 오래된 다양한 형태들이 죽은 하느님의 차갑고 화려한 묘비를 상기시킨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올해 부활대축일에 많은 성당은 틀림없이 텅 빌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장소에서 빈 무덤에 관한 복음을 선포할 것이다. 텅 빈 교회의 상태가 우리에게 빈 무덤을 상기시킨다면, 우리는 천사가 들려주는 다음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는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이번 부활대축일에 묵상해야 할 내용은 이렇다. 오늘날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가?

사회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에는 원주민’(die Beheimate, 여기에서 원주민은 종교의 전통적인 형태에 자신을 온전히 동화시키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론적인 무신론의 추종자도 지칭한다.)이 점점 줄어들고, ‘구도자’(die Suchende, 앞의 원주민과 대비하여 이주민으로 번역할 수 있다)가 늘어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종교에 관심이 없는 자’(die Apatheiste, 종교적인 물음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대답에도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의 수도 늘어난다고 한다.

자신을 신앙인으로 여기는 사람과 비신앙인으로 여기는 사람을 분류하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구도자는 신앙인(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보다는 하나의 여정으로 여기는 사람을 지칭한다) 가운데도 있고, 비신앙인 가운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비신앙인은 주변에서 제시하는 종교적 표상들을 거부하지만 진정한 목마름을 잠재울 수 있는 샘의 갈망을 느낀다.

나는 죽음을 이기신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가야하는 이 현대의 갈릴래아가 바로 구도자의 세계라고 확신한다.

 

구도자에게서 그리스도를 찾음

해방신학은 우리에게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를 실행하려면, 무엇보다도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념을 버려야 한다. 부활하신 분은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근본적으로 변화되셨다. 복음이 전하듯이, 그분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것을 우리는 그대로 믿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 손을 대는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이 떠맡으셨던 세상의 상처, 교회의 상처, 육신의 상처 등에서 그분을 만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그분을 더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개종을 집요하게 권유하는 우리의 태도도 버려야 한다. 우리가 구도자를 가능한 한 빨리 회심시켜 우리 교회의 제도적이고 정신적인 기존 울타리에 가두어놓기 위한 계획으로 구도자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안의 잃은 양들을 찾으셨지만, 그들을 당시 유다교의 기존 제도 안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전통의 보화로부터 새로운 것만이 아니라 옛 것도 발견하여, 그것에 대하여 구도자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 우리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더 넓혀야 한다. 우리가 교회의 성전에서 이방인의 뜰을 관대하게 개방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주님은 이미 성전 안으로부터 문을 두드리셨고, 이미 밖으로 나가셨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이제 그분을 찾고 그분을 추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타인을 두려워하여 닫아 걸은 문을 열고 나가셨다. 그분은 우리가 방패로 삼는 벽을 뚫고 나가셨다. 그분은 사방이 높게 가로막혀 우리에게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을 여신다.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초대교회는 그 역사 시초에 성전 파괴를 체험하였다. 그 성전은 예수님이 기도하셨고 당신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곳이다. 이에 대해 당시 유다인은 창조적이고 용기 있는 이런 해결책을 찾았다. 곧 파괴된 성전의 제단을 유다인 가정의 식탁으로 대신했고, 제사규정을 사적 기도나 공동 기도에 대한 규정으로 대체하였고, 번제와 희생제를 입술과 생각과 마음 등의 제사, 기도와 성경 연구로 대체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회당에서 추방되었던 초창기 그리스도교도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았다. 그러니까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은 전통의 폐허 속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것을 배웠다. 지금 우리도 이와 흡사한 상황에 있지 않는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5세기 초에 로마가 몰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제각각 성급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방인들은 로마의 몰락을 그리스도교의 수용 때문에 내려진 신들의 형벌로 보았고, 그리스도인들은 창녀 바빌론의 생활을 아직 근절하지 않았던 로마에게 내린 하느님의 형벌로 생각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두 해석을 거부했다. 그는 그 변혁의 시기에 두 왕국”(civitates)의 영원한 싸움에 대한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 두 왕국은 그리스도인의 나라와 이방인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두 가지 사랑을 뜻한다. 그 하나는 초월에 닫혀 있는 자기사랑(amor sui usque ad contemptum Dei)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이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사랑(amor Dei usque ad contemptum sui)이다. 문명이 변화되는 이 시대는 현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신학과 교회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지만, 교회가 어디에 없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고 정교회의 신학자 예브도키모프(Evdokimov)는 지적한 적이 있다. 지난 공의회에서 다루어졌던 보편성교회일치운동의 단어는 아마 새롭고 더 깊은 의미를 얻어야 할 것이다. 더 넓고 더 깊은 교회일치운동, 말하자면 더 용기 있게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는시대가 왔다.

우리는 성전이 텅 비고 고요하던 이번 사순절의 사태를 짧은 일시적인 현상으로만 받아들여 곧장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사태를 하나의 카이로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지금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인 대유행은 우리의 세상이 지금 만나고 앞으로도 만나게 될 전 세계적인 유일한 위협이 결코 아니다.

다가오는 부활 시기를 그리스도를 새롭게 찾는 시기로 받아들이자.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 계신 분을 찾지 말자. 그분을 담대하고 지속적으로 찾자. 그분이 낯선 분으로 우리에게 발현하시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서,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에서, 평화를 가져다주시고 공포를 몰아내시는 그분의 영에서 그분을 알아차릴 것이다.

 

* 토마시 할리크(1948년생)는 현재 프라하 카를 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체코 그리스도교 아카데미의 회장과 프라하 아카데미 공동체의 주임신부를 역임하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하 교회에서 활동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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