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예수고난회 수사신부님

홈지기2020.05.25 20:25조회 수 9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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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학교를 준비 하면서,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기도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그분의 저작물들을

묵상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바오로에겐 삶과 기도라는 이분법이 없다는 겁니다. 바오로에게 기도와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바오로는 “늘 기도하라” (테살로니카 전서 5:17) 는 성서의 권고를 문자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가 지도하는 사람들도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기도는 걷든지 자든지, 서든지 앉든지,

일하든지 쉬든지 계속해야 한다.” 

바오로의 신앙의 일차적 전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서 활동하고 계시며 언제나

우리와 통교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성서의 표현을 빌면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신다” (시편 121:4)  유명한 시편 139는 이런 신앙을 좀 더 긴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
뒤에서도 앞에서도 저를 에워싸시고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으십니다.
   


바오로에게 기도란 물고기가 물에 있듯, 인간은 늘상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에 단지 주의를 하느님께 두어

나와 하느님을 연결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영적스승들의 세계에는, ‘만일 네가 기도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면 너는 깊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옛말이 있는데, 바오로는 분명히 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기도란? 이미 최상으로 주어지는 내 삶에 온전히 투신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활동에 저항하거나 하느님의 통교를 거부하지 않는 한, 비록 언제나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아니라 해도

우리는 존재의 한 가운데서 이것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바오로는 “하느님의 품” 혹은 “하느님의 품에서 마시기”로 표현합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아기라는 심상에서, 하느님은 인간인 어머니가 할 수 없는 것까지 우리에게 해주십니다. 사람인

어머니는 아기에게 하루 종일 먹일 수 없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하신다 겁니다. 십자가의 마리아 원장에게

쓴 편지에서 “거룩하신 분의 품에서 거룩한 사랑의 풍부한 젖을 먹는 어린 아기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고통을 입고 언제나 밤이고 낮이고 천상 아버지의 품에 머물러라.”(II, 309) 젖먹이 아기가 있는 어머니는

깨어있는 낮 동안은 물론이고 밤에도 최소한 한번은 젖을 먹이듯, 우리의 의지가 그분께 있는 한 하느님은

밤낮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러한 자각은 주체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의 전환입니다. 인디언의 복음 중에서

양파 파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멕시코시티의 대형 시장 그늘진 한 구석에 ‘포타라모’라는 인디언 노인이 있었다. 노인 앞에는 양파 스무

줄이 걸려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맙니까?” “10센트라오.”

포타라모는 말했다. “두 줄에 얼맙니까?” “20센트라오.” “세 줄에는요?” “30센트라오.” 그러자 미국인이

말했다. “별로 깎아 주시는 게 없군요.” “안되오.” 인디언이 말했다. “스무 줄을 다 산다면 얼맙니까?”

미국인이 물었다. “스무 줄 전부는 팔수 없소.” 인디언이 말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 미국인이 물었다. 그러자 인디어이 답했다. “아니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서라피(=어깨에 걸치는 모포)를

사랑한다오. 베드로와 루시아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애기를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친구들을 보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걸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를 스무 줄을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이 이야기의 노인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바오로가 삶을 바라봤던 시각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삶, 그 안에 있는 인생의 성스러움을 고요히 껴안고 있다고 할까요? 혹은 바오로의 표현대로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이고요.


이런 면은 다코타 족 인디언 추장 오히예사가 한 연설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디언의 삶 속에는 단 하나의 의무만이 있었다. 그것은 기도의 의무였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를 날마다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우리에게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우리의 아내나 남편이 우리보다 먼저, 또는 나중에 그곳에 나와 기도를 올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함께가 아니라 각자 홀로 기도했다. 모든 영혼은 각자 아침의 태양과 만나야 한다.


새롭고 부드러운 대지, 그 위대한 침묵 앞에 홀로 마주서야 한다. 사냥을 나간 인디언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말을 잃을 때가 있었다. 바위산 위에는 검은 먹구름과 함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푸르른 계곡 심장부에서 하얀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그런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예배하는 자세를 갖추곤 하였다. 그러기에 인디언은 굳이 일주일 중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이 준 날이기에!”


바오로에게 삶이란 우리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로 그 삶을 성스럽게 하는 하느님의 소유권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겁니다. ‘먹기 위해 요리하는 것이 아니고, 깨끗한 접시를 얻기 위해 설거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거지요. 우리는 요리하기 위해서 요리하고, 설거지하기 위해서 설거지해야 합니다.

일 자체가 어떤 지향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 모든 일은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먹고,

숨쉬고, 요리하고, 물긷고, 변기닦는 그 모든 것이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요리하는 기술, 청소하는

기술을 익힌 사람은 세상이 휘뒤루는 무기인 명성, 권력, 돈을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라는

파도가 어떻게 밀려와도 그는 언제나 담담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지도를 받는 사람 중 한 사람인 토마스 포시는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에게 바오로가 말합니다. “네 영의 내면의 궁전에 머물게 되는 그 거룩한 고독이 가정사를

돌보는 일이나 다른 의무로부터 너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네 책임이고 이에 충실함이

하느님을 더욱 기쁘게 하는 것이다” (I, 641). 다른 편지에서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온전히 잠심에

들어 영과 진리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천상 아버지의 품에 네 자신을 맡겼을 때도, 이런 잠심은 네게서

집안일에 대한 관심을 빼앗아 가지 않으며 거룩한 사랑의 향기를 풍기면서 더욱 열심히 완전하게 그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I, 592)


삶과 기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삶을 분리하려 할 때 우린 하느님을 떠나 있게 됩니다.

바로 자의식, 내가 있다는 의식이 가슴에서 튀어 나오는 겁니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영혼 안에

이중성과 비유사성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영혼은 자기 안으로 되돌아와서 더욱 참된 자기가 될 때에 이 자의식은 사라집니다. 의식되지 않을수록

활동은 그만큼 더 순수하고 효과는 더욱 커지고, 활기에 넘치는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도하는 마음은

늘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사제는 전례시 향을 두손으로 들어 분향합니다. 무엇 때문에 두 손을 사용하나요? 향을 집을 때 100%

자신의 마음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나 딸의 손을 잡을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지나요? 아내를

포옹할  땐 모든 일은 다 잊어야 합니다. 차를 마실 때 온 정성을 다해 찻잔을 감싸고 온 마음을 다해 차를 마시듯... 일상의 모든 일에 정성을 기울여 할 때 그 모든 일들은 참된 예배 가됩니다. 먹기 위해 요리하는

것이 아니고 깨끗한  접시를 얻기 위해 설거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리하기 위해 요리하고 설거지하기

위해 설거지합니다.


우리를 가두는 것은 감옥의 쇠창살이 아니라, 풍요한 축제가 벌어지는 하느님이 베푼 내 삶의 자리에

오롯이 참여하지 못하는 상태(편심,중심이탈)입니다. “주님께서 네게 원하는 것이 그것이므로 집안일에

관심을 기울여라” (I, 752). “억지로 머리를 써서 하려 하지 말고, 네 마음을 모아들이라” (I, 546).

“살아있는 신앙으로 하느님께 사랑어린 관심을 기울이며, 사랑의 거룩한 침묵 속에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당신은 24시간 지속되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영과 진리로(요한 4:24) 그분을 찬양하며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에 있기 때문입니다” (I,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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